Essay

우리 시대의 보편적 건축양식

도시 목구조의 복권

도시에서 건축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다.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땅 위에, 가장 보편적인 기능을 담고, 가장 보편적인 규모로 서 있는 수많은 ‘중간건축’에 도시와 우리의 일상이 달려있다. 블록형 아파트를 지나 단독주택 집짓기의 광풍을 거치며 비로소 목구조는 다시금 도시건축의 주요한 양식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과 계층에 국한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층목조를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공학목재를 활용한 몇몇 파일럿 프로젝트’들이 힘겹게 진행하고 있다.  

목조건축이 다시금 우리 시대의 도시 문화로 자리잡길 기대한다. 가벼운 나무가 주변의 익숙한 재료와 만나 도시와 마을에 묵직한 존재감을 갖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목구조 산업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묵인한 채 발전하고 있다. 혹은 일방적으로 특수한 것들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중간건축’의 영역에서 도시목조의 복권을 애써 준비해야 한다.

도시건축에서 목조의 가능성과 한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명백한 가능성은 차치하고, 빈약한 한계에 대해 먼저 말해야겠다. 실상 한계의 대부분은 산업생태계의 부실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몇 차례의 시도를 통해 쉽게 넘을 수 있는 제약에 불과하다. 반면 목구조에 대한 ‘단편적 인식’은 장벽처럼 굳건하다. 전문가와 달리 일반인은 외려 가볍고 따뜻한 내장재인 나무에 매료되어 있다. 이제는 전문가 집단이 변해야 할 차례이다. 오래되서 진부하거나 특별해서 접목시키기 어려운 공법이 아니라, 유용한 디자인 수단으로 활용하고 ‘우리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대하고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도시목조를 바탕에 두고,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고유한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단순한 기술적 해결을 넘어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거쳤을 때, 비로소 우리 시대만의 보편적 건축양식으로 나무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양식은 공간의 구성 원리에서부터 건축의장에 이르기까지 구축과정 전반에 변화를 주도할 것이고 이는 우리네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단편적 인식을 넘어 시장의 수요에 맞는 건강한 생산기반이 조성되어야 실현된다.  도시건축에서 ‘보편성의 확보’는 다양한 영역에서 벌이는 불완전한 실행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가능하다. 이 지난한 과정을 해쳐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미약하지만 유일한 방법이고 이미 누군가는 진부한 다양함을 거부하고 구체적인 새로움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막연한 새로움에 지치고 갈급한 이들이 ‘도시 목조의 복권’에 함께 동참하길 기다린다. 

 

허용오차

‘싫증없는 엄밀함’
무언가를 만듦에 있어서 주어진 허용오차를 파악하여 근접하게 반영하는 순간. 그는 장인이라 불려 마땅하다.
정확도에 대한 고집스러운 천착은 ‘A to Z’를 아우렀을 때 빛나기보다는, 틈을 유발하는 W가 느슨한 S와 뒤엉켜 H를 만났을 때이다.
우리는 W를 포함시킬수 있는 상상력과 S를 집어들 줄 아는 지식, 그리고 H를 구현하기 위한 집념들 사이에 잠정적인 균형을 위해 분투한다.

약한 구조

약한 구조, 민감한 구조를 다루면서 많은 것들과 대화하게 된다.
취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은 한번에 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취약하기에 두 세번에 걸쳐 감싸고, 막고, 또 다시 숨통을 열어줘야 한다.
그 와중에 어느새 더 안전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 덕분에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새로움이고, 근본을 뒤흔들지 않는 새로움이 가능하게 된다.
아름다움, 오래된 것의 새로움을 찾게되는 기회가 열린다.
고민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손끝의 감각과 가벼운 부재

모래성을 쌓는다.

손 끝으로 전해오는 단단함이 느껴질 때 슬며서 손을 빼기 시작한다. 손끝의 감각은 파도가 몰려오기 전까지는 남아있기 마련이다. 혹은 약한 물결을 견딜 때에 우리는 물결의 힘과 손 끝에 남아있던 모래알갱이들의 힘을 견주어 비교해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해온 것이다.

치장벽돌을 받치기에 적합한 앵글은 어떤 크기에 어떤 방식으로 구체에 결합되어야 하는 걸까? 벽돌의 하중을 파악한 후 앵글의 단면 모멘트를 기준으로 간단한 계산식을 거치면 어느 정도 확신에 가까운 방편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목재 사이딩 마감이었다면, 혹은 각각의 판석을 미늘쌓기한다면, 우리는 계산식 없이도 적당한 부속철물을 선택할 수 있다. 석공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가부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업하기를 원할 것이다.

건축가의 직관은 현장 기술자와 마찬가지이다. 건축가의 작업도 일정한 스케일 안에서 조정가능하다. 그에 적합한 소재의 범위도 분명할 것이다. 구조계산에 기대지 않고, 가늠할 수 있는 하중과 그에 부합하는 소재의 선택이란 짓고 다듬어야하는 건축가의 작업에 다소간의 자유를 보장한다.

붉은 흙

십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꾸깃꾸깃한 종이에 아버지가 거칠게 그려서 보여주셨던 우리집.  철골조로 지어질 것이고, 중앙에는 육각형의 거실이 있었고, 거실에 면해서 여섯개의 사각형 방들에 저마다의 실명을 적어두셨다. 각 사각형 방들 사이에서 생기는 삼각형 공간들은 발코니이거나, 창고, 계단으로 쓰일거라고 말씀하셨다. 엄정한 정육각형의 평면을 보며, 팔라디오와 루이스 칸을 떠올렸었다.

이제 흙벽돌 방을 만들고 싶으시다며 하나를 더하시고 계시다. 숱한 바닥난방 재료마감표를 그리면서 한번도 그려보지 못한 장면이고,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일어난다. 고구마 캐고, 지랑이 잡던…. 맨발로 후비고, 코 박고 냄새맡던…. 붉은 흙이 우리집 바닥에 들어왔다. 비로소 그 어떤 건축가의 이름도 작품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가 땀으로 지으신 집이고, 내가 좋아하던 우리동네 붉은 흙으로 채워진 공간이다.

 

말하는 건축가

진심은 통한다지만 총천연의 욕망들 틈에 도사리고 있을 딱 그만큼의 고독이 무섭다. 
‘시지프’의 고집도 우리에게는 없을 뿐 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길 바래는 일상들도 지지부진한 진심들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쿨하지 못함이 죽기보다 싫어서, 히죽히죽 웃어넘기는 베베꼬인 처세술과 안경너머에 숨겨놓았던 섬뜩한 눈빛들에 찬란한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우리는 잘 견뎌왔고, 또 잘 버텨 낼 것이다. 
이제야 보게 된 ‘말하는 건축가’
누군가의 가시밭 길이 우리의 평범함을 토닥여준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는거라며…’

디테일

 

본질적으로 건축은 서사적이다. 이것과 저것의 관계를 조율하는 건축가의 작업은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를 요구받게 된다. 또한 이를 전제로 통합된 하나의 결과물을 향해 내달리기 마련이다. 만약 밀리미터를 밀고 당기는 지지부진한 작업과정 전체를 꿰뚫는 원칙 혹은 원리를 놓치게 된다면 ‘의미있는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란 구현 불가능한 관념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건축에서 합리성이란, 이미 ‘모순과 역설’이 내재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선 그 무엇을 뜻한다. 이는 스케일을 넘나들어 시간을 교차하며, 인식되고 존재하는 건축의 태생적 의무이기도 하다.
 
1. 건축가에게 디테일이란, 일종의 ‘기술권력’이다.
구축의 과정은 응당 부재 간의 분리와 접합을 필요로 한다. 그 중 무엇을 드러내고 숨길지를 정하는 기준은 구축에 담아둔 의도내지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시각은 청각과 후각을 포함한 다른 감각들을 작동시키는 촉매로써 건축적 구상이 가능한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각에 대한 집중은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한편 유용한 기술도구로써의 디테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력이다. 작업참여자, 투입될 부재, 공법의 선정, 공사의 기간 등 전체 공정의 설계뿐만 아니라, 소요될 예산의 분배 역시 디테일에 따라 그 성격을 정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건축가는 디테일의 구성을 통해 구축과정 전반을 조율할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아주 작은 부분의 조정을 통해야만 의미있는 전체를 구상할 수 있고, 또한 관념을 넘어 실제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우리에게 디테일이란, 나름의 ‘자구책’이다.
 우리는 미약한 시작을 준비한다.
 우리가 믿고 따라갈 어떠한 선례도 없다.
 우리를 믿고 맏길 든든한 클라이언트도 없다.
 우리는 우리에서부터 시작이다.
 
우리는 단촐한 집이 필요한 건축주와 집장수들 사이에서 놓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성건축가들에게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해야 하고, 이것들은 건축적으로 현명한 태도로 비춰져야 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결과물은 화려할 수도 없고, 화려해서도 안된다. 보편적이고 실재적인 것들을 새롭게 다루어야만 한다. 눈에 띄는 형태도, 독특한 프로그램도, 비싼 재료도 우리 손에는 없다. 다만, 우리는 디테일을 통해 현실과 이상을 두루 타고 넘어갈 수 있을 뿐이다.
 
3. 단어의 조합이 문장의 형식으로 의미를 드러낸다.
물론 독해의 방식에 따라 이해가 곧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안고, 작은 부분을 고민해야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고, 또 달리보면 생존전략이다. 다행이다. 우리는 단단하고 건강한 그래서 지속가능한 토대를 제공받을 것이다.

“해방된 만드는 자 maker는 가능한 것 the possible에서 할 수 있는 것 the doable으로 나아가는 굽은 길을 따라간다.”  – William James – 

건축 형태를 말하다.

” 건축 ; 형태를 말하다 “
 
얼핏 생각하면 당연하리라 여겨지는 창작과정에서의 자의성을 꼬집어 이야기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기 보다는 새롭고, 
신선하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취하게 된 형태에 대한 인식 혹은 태도들 덕분일 것이다.
본문의 내용대로 그동안 건축가들은 ‘형태의 자의성과 그 필연성’이라는 주제를 언급하기 꺼려했고, 오히려 감추려 노력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다.
 
이 책에서 ‘자신의 건축은 자의적인 것이 주도하지 않기를 의도하는 편’이라 밝히는 라파엘 모네오는 짧은 역사적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건축의 긴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견해를 진솔하고 정중하게 피력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축실무자로써 또 동시에 학생을 지도하는 이론가로써, 그가 이 주제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고민해왔을 것이고, 또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해 왔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은 일찌감치 차치해도 무관하다.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그 사건들 안에 교묘히 자리하고 있는 모순과 역설들을 풀어헤쳐 보여주려는 의도를 힘주어 담아놓았음이 읽혀진다. 물론 책의 초반에는 텍스트를 앞에 도판을 뒤에 놓는 배열로 독자를 계속해서 다음 내용으로 끌어당기고, 후반부에 가면서 그 순서를 바꾸어 도판을 텍스트의 앞에 두어 점점 내용에 확신을 실어주는 교묘한 책의 구성도 한 몫을 했겠지만, 역사적 시간 순으로 서술해가는 구성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자의성’이라는 개념에서 의도치 않게 멀어져왔고 또 무뎌지게 되었는지를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왜 이처럼 역사의 실천적 기초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이고 실증적인 이론서가 나오지 못할까.’하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쉽게 말해야겠다. ‘왜 우리는 실무와 이론을 함께 고민해 온 건축가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제도적인 기회의 문제인지, 개인적인 역량의 문제인지, 복합적인 둘 다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저런 건축가가 드러나 활동하고 있다는 게 부럽고 참 탐난다. 
 
시대를 통틀어 ‘자의성’과 가장 거리를 둔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라파엘 모네오는 ‘토속건축’이라 답했다.
문득 ‘자의성’이라는 뜻과 ‘작가성(?)’이라는 단어를 바꾸어 책의 내용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부분부분 뜻이 어긋나지만, 전체적으로는 크게 달라질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역사적 에피소드의 자의적인 편집을 통해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작가성(?)을 입증한 셈이다.
자신의 뚜렷한 견해와 세심한 (글쓰기) 작업을 통해서…….

다른 나라에서

곰소나 격포가 지겨워지면, 그때야 ‘모항’은 주말 외출을 위해 선택되어지고는 했다. 그곳 횟집에서 ‘광어회’라는 메뉴는 우럭만큼이나 보편적이어서 석회구이와 젓갈정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고, 듬성듬성 자라나 있는 소나무보다 방풍 성능이 뛰어난 것은 그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공중 화장실이리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부안은 서해안 풍경이 늘 그렇듯 그 안에 비린내를 품고 있다. 그것은 수산시장 곁을 걸으며 맡을 수 있는 강렬한 비릿함과는 다르다. 후각이 피로해진 후에야 온 옴을 통해 느껴지는 비릿함은 사람의 살 냄새 만큼이나 은밀하고 강박적이다.
내가 익히 경험해오던 풍경들이 거칠게 처리된 줌인과 줌아웃을 통해 영화내내 보여졌고, 나는 더이상 이야기꾼이 늘어놓는 조금 다른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이전의 홍상수 영화가 지배적으로 전달해주던 심리적 불편함과는 다른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나에게는 영화 속 주인공이 들고 다니는 ‘랜턴’이 파도 위에 세워진 ‘등대’보다 더 밀접하고 끈끈하게 다가왔고, 그의 티셔츠에 박혀있는 ‘해양 구조단’이 사람들이 그를 가리키며 뱉어내는 ‘LIFE GUARD’보다 더 적확하게 주인공을 설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20년 넘게 나는 그 투박함들과 온 몸으로 부딪쳐가며 자라왔다. 시시껄껄한 삶들이 꾸며놓은 어설프고 거칠게 처리된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그곳에서 뛰쳐나오고 싶도록 만들었으며, 그러지 못하고 그안에서 지내야하는 동안 나는 그것이 지겹도록 싫어져 버렸다. 그곳을 떠나면서 내 마음속 다짐은 분명했다. ‘조금 달라지자. 이전과도 달라지고, 남들과도 달라지자.’  그 다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긴 여정을 돌아다녔으며, 온갖 고생을 주저없이 해왔다. 어느덧 내가 완전히 다른 곳에 도착했으며, 보다 더 세련되고 다채로운 향기를 지닌 마을임에 틀림없다고 확신는 순간. 

나는 다시 그곳에 서 있었다. 멀리서 여기를 그리워하며, 이곳에 서 있었다. 
 
이제 내 본연의 투박함을 재발견하고 돌아간다. 
얄궂게 따라다니는 내 속의 냄새.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생명력의 가치를 이제야 나는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내 안의 비린내가 진동한다.

 

다이얼로그

자다가 깼다.

지금 내린 결정이 이 다음에 돌이켜 봤을 때 최선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당면한 문제에 집중해서 대안을 내놓고, 
또 다음 맞닥드리게 되는 문제에는 그에 맞춰서 대응하는 치열한 과정들이 쌓이다보면 진화한다.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반복되는 치열함 속에서 자기나름의 적응 방식들이 쌓여가면서 독특한 맛과 멋을 갖게 된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의 길에서는 구불구불 하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논리들이 시간을 두고 뒤섞여지면서 만들어 낸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계획해서는 쉽사리  만들어 낼 수 없는 길. 이를테면 논두렁 길은 여유도 있고 나름의 자연스러운 생성의 이유도 갖고 있지만, 
도시의 길이 품고 있는 다채로움과 치열함을 엿볼 수 없지.
 
좋고 가치있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늘 순간순간의 치열함들이 좌충우돌 하면서 빗어지는 것 같아.
우리 인생이 비록 짧지만, 구불구불 자기만의 멋을 드러내는 여정이 었으면 싶다. 
 
[이 새벽에 뭐래니…..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다가 네 생각도 나길래 보낸다. 치열하게 순간순간을 반응하면서 살자.]